군은 1394년(태조 3)에 송경(松京) 정안대군(靖安大君 : 太宗大王)의 사저에서 태종대왕의 제1남으로 태어나 1462년(세조 8) 9월 7일 69세로 작고하였다.
1402년(태종 2) 3월 8일 제(?)란 이름을 받았고 동년 4월 18일에 원자로 책봉되었는데 그때가 대군의 나이 9세였다.
1404년(태종 4) 1월 6일 11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07년(태종 7) 14세로 광산김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숙빈(淑嬪)으로 봉하였다.
대군은 천성이 효우하고 영민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또한 학문에도 정진하였는데 이것은 대군이 지은 `영매(詠梅)’ 시를 보고 알 수 있다.

“讀書三月不窺園
글 읽노라 정원도 돌아보지 못했는데
未覺苑林綠已繁
어느덧 원림에 녹음이 우거졌네
梅子欲成春又晩
매실이 익어가니 봄도 다 갔는데
쬹將幽思立黃昏
부질없이 깊은 생각에 황혼도 모르네 ?

대군은 후일 큰 정치를 이룰 인물'이라고 조야(朝野)의 인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 영문(英聞)이 중국에까지 전해져 명나라 천자인 성조(成祖)는 세자인 대군을 입조(入朝)시키라는 명을 내려 1407년(태종 7) 9월 25일 14세 소년의 몸으로 하진표사(賀進表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때 태종대왕은 서대문 밖 양철원(梁哲院)까지 나와 전송하였고 배종한 신하는 완산부원군 리천우(李天祐), 단산부원군 이무(李茂), 계성군 이래(李來), 제학 맹사성(孟思誠), 총재 이현(李玄), 서장관 집의 허주(許稠) 등 일행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명나라에 가자 명 황제는 대군의 의젓한 인품에 감탄하여 `현세자(賢世子)'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6부상서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서각문(西角門)에서 인견할 때에는 섬돌에 오르게 하여 대군을 보고 말하기를

“생김새는 그대의 부왕을 닮았고 키는 좀 다르구나.”라고 칭찬하였다 한다.

그리고 <인효황후권선서(仁孝皇后勸善書)> 150본을 하사하고, 또 황제가 무영전(武英殿)에 거둥하면서 다음과 같은 어제시(御製詩)를 내렸다.

浿水東邊舊封域
패수의 동쪽 땅에는 옛부터 왕국인데
八敎疇能遵古式
범금팔교 그 누가 옛법대로 따르는가
簡篇自足鑑安危
선대 전적(典籍)을 통해 나라 안위살피거니
淵藪何須更藏匿
깊고 깊은 연수인들 못된 무리 숨을손가

이와 같이 대군은 성동(成童)의 나이로 외교사절의 예절을 손색없이 수행함으로써 황제의 총애를 한껏 받고 귀국하였다.

1408년(태종 8) 15세 4월에 서울로 돌아와 대군의 둘째 아우인 충녕대군(忠寧大君 : 世宗大王)이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고, 또한 부왕인 태종대왕도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울려줄 뜻이 있음을 짐작한 후로부터 세자의 자리를 사양 하였다.
그리하여 덕을 숨기고 영광을 감추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음주와 매사냥 등의 놀이를 일삼아 대군에게 쏠려 있는 기대를 충녕대군에게 옮겨가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이는 부왕께 효도함이요, 아우인 충녕대군에게는 의를 상하지 않게 하면서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성군이 되게 함이었다. 

1417년(태종 17) 24세 세자위를 사양할 뜻이 날로 심화됨에 그 도가 지나쳐 마치 미친 사람의 행동에 가까웠는데 세인들은 `양광(佯狂 : 거진 미친 짓)'이라 칭하였다. 대군의 양광이 날로 심하자 태종대왕은 세자를 폐하려는 뜻을 품고 조정 각 대신들에게 그 가부를 물으니 류정현(柳廷顯)은 폐하길 주장했고 판서 황희(黃喜)와 이직(李稷) 등은 세자의 현명함을 아는지라 한사코 불가함을 주장했다. 이로 인하여 황희와 이직은 6년 동안이나 외직으로 좌천되고 귀양살이까지 하였는데 후에 황희는 호조판서로, 이직은 이조판서로 다시 등용되었다. 

1418년(태종 18) 25세 어느날 밤에 대군은 첫째 아우인 효령대군의 침소로 찾아 가서 “그대는 충녕의 덕이 훌륭함을 아는가.”하고 물으니 효령대군이 즉시 “잘 아옵니다.” 하니 대군이 “그렇다면 우리 형제가 오늘밤으로 단행하자.”하고 함께 담장을 넘어서 성밖으로 탈출하여 대군은 행궁에 숨고 효령대군은 절로 들어갔다가 태종대왕이 찾자 3일 뒤에야 비로소 대군과 효령대군은 대궐로 들어 갔다. 이해 6월 3일 세자를 폐하여 양녕대군으로, 숙빈 김씨를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으로 강봉하였다. 그리고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그해 왕위에 올라 세종대왕이 되었다.  대군은 세자위를 폐위당하고도 오히려 좋아하며 “충녕이 과연 내게 속았다.” 하며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한다.  

1421년(세종 3) 28세 대군의 장자 애(言豈)가 장성하여 순원군(順原君 : 順城君)에 봉해졌다. 
1425년(세종 7) 31세 대군이 이천(利川)에 있을때 세종대왕이 동대문 밖에서 대군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1431년(세종 13) 38세 세종대왕이 대신 김종서(金宗瑞)에게 이르기를 “경이 일찍이 간관이 되어 자주 양녕의 일에 대하여 그대로 두지 말라 하니 이는 나의 본심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양녕의 과실은 여색에 빠지고 행실이 좀 광패(狂悖)하고 올바른 가르침을 지키지 않는 데에 불과한지라 태종대왕은 대의로서 폐하였거니와 만약 천륜으로써 따져 본다면 이 왕위야말로 양녕이 차지할 자리이니 이제 내가 대신 앉아서 온 나라의 주인으로 받듦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일개 민간의 필부(匹夫)로서도 형제간에는 서로 잘못을 감추어주고 좋은 점을 드러내어 과실이 없게 하는 것이며 혹 불행이 닥치게 되면 뇌물이라도 바치고 애걸이라도 해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모면하게 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지정(至情)이며 지애(至愛)이거니 하물며 나는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도리어 저 민간의 필부만도 못하게 형 하나를 비호하지 못하겠는가? 경은 나의 이 뜻을 깊이 알아서 여러 사람에게 알리라, 내가 장차 양녕을 서울집으로 불러들여 자주 만나 형제간의 우애하는 도리를 다하겠노라.” 하였다. ▲1437년(세종 19) 44세 정월 초 3일 세종대왕의 특명으로 대군은 20년만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 처음에 태종대왕은 대군을 서울 밖으로 내보냈으나 그후로 세종대왕이 항상 청하자 마침내 서울로 오게 한 후로는 우애가 더욱 두터워졌다. 세종대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궁중에 불러 잔치를 베풀고 서로 즐겁게 놀았다.
어느 때는 세종대왕이 대군과 같이 한강에 배를 띄워 선유(船遊)할 때 대군에게 술을 권하며 말하기를

“저 강변의 그윽하고 경치 좋은 곳에 정자 하나 지으면 어떨까요.” 하니

대군은 북쪽 강 언덕 그윽하고 풍경이 좋은 곳을 가리키며

“저기 저곳에 하나 지었으면 좋겠군요. ”하였다.

상감은 관에 명하여 정자를 짓게 하고 그 낙성연에 친히 나와 대군에게 하례하기를,
“형님은 길이길이 백년 복을 누리세요.” 하니

대군은 배사(拜謝)하며,

“참으로 일세에 영광이로소이다.” 하자

세종대왕은 정자이름을 `영복정(榮福亭)'이라 명명하고 편액을 친히 써서 걸게 하였다. 

대군은 문?무를 겸비하였지만 양위한 후에는 일상생활이 팔도강산을 유람다니는 일 뿐이었다. 아우 세종대왕도 형을 지극히 위하여 언제나 뜻을 다 이루어 주었다. 특히 대군이 유람을 갈 때에는 언제나 내관(內官) 한 사람을 비밀리에 뒤를 따르게 하여 대군이 좋아하는 바를 이루어 주었다. 한번은 대군이 충청도 문의(文義) 땅 기일봉(基日峰)에 올라 사냥매를 날린 후 사방을 둘러보니 농토는 기름지고 산수 풍경이 아름다운지라

“아 산천의 아름다움이여, 가히 살 만한 고장이구나.” 하고 감탄하자 그 말을 엿들은 내관이 세종대왕에게 알리자, 곧 그곳을 모두 대군에게 하사하였다. 지금도 그 고장 사람들이 `양녕대군댁 옛 사패지지'라 일컫는다. 

1450년(세종 32) 57세 2월 27일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문종대왕이 즉위하였다. 대군은 세종대왕의 국상을 당한 후로는 더욱 더 무상을 느끼고 세상일에 뜻이 없어 영남 ? 호남 지방으로 떠나 가야산과 지리산을 두루 구경하고 나중엔 문의 기일봉으로 돌아왔다. 이해 9월에 아우 효령대군과 함께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 : 대군의 매부)의 사궤장(賜?杖 : 임금으로부터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받는 것)연에 참석하였다. 이날 충정공 박팽년(朴彭年)이 축하 시첩의 서문을 지어 찬미하였다. 

1455년(단종 3) 62세 윤 6월 12일 수양대군이 단종대왕으로부터 수선(受禪)하여 세조대왕으로 즉위하자 대군은 세조대왕에게 “수선한 임금은 먼저 임금님의 위호를 정해 올려야 합니다.” 라고 말하여 흉흉했던 인심을 바로잡았다. 

1456년(세조 2) 63세 4월 대군은 관서지방의 경개를 구경가서 묘향산에 올라 시를 읊으니 저 유명한 명시 `제향산승축(題香山僧軸)'이 그것이다. 

山霞朝作飯
산의 노을로 아침에 밥을 짓고 
蘿月夜爲燈
숲 사이 돋는 달로 밤에 등불을 삼 네
獨宿孤庵下
외로운 암자 찾아와 홀로 자니 
惟存塔一層
중들은 어디가고 탑만 서 있네 

이 해 6월에 세조대왕은 상왕인 단종대왕을 노산군으로 봉하여 강원도 영월로 유배시켰다. 이때 대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관서지방으로 유람을 떠나 가을에 서울로 돌아왔다.

대군이 만년에는 묘향산 유람을 결정하니 세조대왕이 말하기를,

“지금은 국태민안하고 백부께서도 몸이 강건하시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관서지방은 본시 번화하고 또한 색향이라 하오니 풍류를 좋아하시는 백부께서 혹 과하심이 있을까 걱정이외다.” 하니

대군은 정중한 태도로

“늙은 몸이 어찌 그러한 일로 해서 상감께 걱정을 끼쳐드리오리까? 신이 마땅히 조심하오리다.”하였다.

그러나 세조대왕은 평안감사에게 밀지를 내려 분부하기를

“양녕대군께서 유람 행차하시는데 아름답고 영리한 기생으로 하여금 대군을 가까이 잘 모시어 무료한 객회를 풀어드리게 하라.” 하였다.

그런데 대군은 행차하는데 주색을 멀리하기 위하여 각 고을에 환영연을 금지하였다. 그러던중 대군이 영변에서의 여독으로 인해 며칠간 머물게 되자 영리하고 예쁘장한 10여 세 된 소년만이 영변부사의 명령으로 시중을 들게하였다. 그런데 이 소년을 연(緣)으로 해서 `정향(丁香)'이란 기생이 소년의 누이로 가장하여 대군과 인연을 맺었다. 대군은 비밀에 부칠 것을 당부하고 그곳을 떠날 때 이별시<구난가(九難歌)>를 선물하였다.

<留別丁香九難歌>

“難難.
爾難我難.
我留難爾送難.
爾南來難 我北去難.
空山夢尋難 塞外書寄難.
長相思一忘難 今相分再會難.
明朝將別此夜難 一盃永訣此酒難.
我能禁泣眼無淚難 爾能堪歌聲不咽難.
誰云蜀道難於乘天難 不如今日一時難又難

어렵고 어렵구나. 너도 어렵고 나도 어렵구나. 나는 머물기 어렵고 너는 보내기 어렵구나. 너는 남으로 오기 어렵고 나는 북으로 가기 어렵구나. 공산(空山)에 꿈 이루기 어렵고 변방에 소식 전하기도 어렵구나. 임 생각 잊을 일이 어렵고 오늘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도 어렵겠구나. 내일이면 이별이니 이 밤 지내기 어렵고 한잔이면 이별이니 이 술 들기도 어렵구나. 내 울지 않아도 눈물 금키 어렵고 네 노랫소리 목메이지 않기도 어렵구나. 뉘라서 촉도길이 하늘 오르기보다 어렵다 하더냐. 그보다도 오늘 이별이 더 어렵고 또 어렵구나.” 

이 부채를 선물받은 정향은 즉시 영변부사에게 바치고 부사는 평안감사에게, 감사는 바로 세조대왕에게 전했다. 세조는 곧바로 정향을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대궐안에 머무르게 하고 대군이 유람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환영연을 베풀었다.
취기가 오른 세조대왕은 웃는 낯으로

“백부께서는 떠나실 때 다짐을 저버리시지는 않으셨겠는지요?” 하고 물으니
대군은

“노신이 어찌 다짐을 저버리오리까.” 하였다.

세조대왕은

“임금으로서 여색과 풍류를 탐냄은 좋지 못한 일이나 오늘 만큼은 백부를 위하여 시골기생 하나를 불러 노래도 한 곡 들어 볼까 하는데 백부의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하고 물으니 대군은 좋다고 찬동하였다.

세조대왕이 한 기생을 나오라 분부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니 그 기생은 부채를 부치면서 시 한 수를 읊으니 대군은 처음에는 그 몸 맵시를, 다음은 그 음성을, 다음은 그 가사를 듣고는 깜짝 놀라서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청하니 세조대왕은 대군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위로하기를,

“실로 이 연극은 과인이 백부의 객회를 돕기 위하여 꾸며낸 바이니 허물이 있다면 과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고 모두 한바탕 웃고 정향을 가마에 태워 대군댁으로 보내 대군을 모시게 하였다. 

대군은 관서지방을 유람할 때 지은 시가 여러 수 있는데 그 중 두 수를 소개한다.

<戱贈西關妓>

“別後音容杳莫追
이별 후 소식 묘연하니
楚臺無路覓佳期
초대에 만날 기약 없구나
粧成玉貌人誰見
단장한 고운 얼굴 누가 보리요
愁殺紅顔鏡獨知
수심진 홍안은 거울이나 알겠지
夜月猶嫌窺繡枕
달빛은 베갯머리 엿보고
晩風何事捲羅츋
바람은 무슨 일로 휘장을 걷어 치나
庭前賴有丁香樹
뜰앞에 정향수 서 있기에
强把春情折一枝
춘정을 못잊어 한 가지 꺾었네

<贈別丁香>

別路香雲散
이별길엔 향운이 흩어지고
離情片月鉤
이별의 정은 구부러진 조각달
可憐轉輾夜
가련타 잠 못 이루는 이밤에
誰復慰殘愁
뉘라서 내 수심 위로해 주랴 

1457년(세조 3) 64세 이해 여름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같이 단종대왕을 복위시키려다 발각되어 잡혀 죽었고 여기에 연루되어 형을 받은 이가 많이 생겼다. 이때 대군이 궁인을 시켜 못물에 부채질을 하여 살얼음이 지게 하자 세조대왕도 그 뜻을 짐작하고 궁녀를 보내 부채질을 돕게 하였다 한다. 못물에다 부채질을 한 대군의 속 뜻은 세조대왕이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만들어 형벌을 가하거나 죽이는 것이 마치 차지 않은 못물에다 마구 부채질을 해서 살얼음을 지게 함과 같은뜻으로 세조대왕을 풍간으로 깨닫게 한 것이다. 세조대왕이 대군의 이같은 속마음을 짐작하고 부채질을 도왔다면 이미 깨달은 바가 있었으리라고 하였다. 그후 대군은 더 이상 서울에 머무르지 않고 서울을 떠나 충청도지방을 유람하다가 10월 24일에 단종대왕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속리산에서 듣고는 시 한 수를 지어 탄식하였다.

<俗離山聞寧越凶報>

龍御歸何處
아 임이여 어디로 가셨는가
愁雲起越中
구름은 시름인양 영월에서 떠오르고
空山十月夜
쓸쓸한 가을밤 밤 새워가면서
痛哭訴蒼穹
하느님 맙소사 통곡하였소. 

이 시에서 단종대왕을 `용어(龍御)'라 표현한 것은 대군의 심정을 알 수 있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호소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통해 했는지 알 수 있다.  

1462년(세조 8) 69세 이해 9월 6일 대군은 향년 69세로 별세하였다. 세조대왕은 부음을 듣고 3일간 정사를 폐하고 `강정(剛靖)'이라 시호를 내렸다. 자녀는 정실에서 3남 4녀를 두고, 측실에서 7남 11녀를 두었다. 대군은 임종시에 유언하기를,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며 묘비도 세우지 말것이며 상석도 놓지 말고 산소치장을 극히 검소하게 하라.” 고 하였다. 산소는 금천 강적골이니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산65의 42번지 곤좌간향에 모셨다. 석물을 세우지 말라는 대군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7대 후손 참판 만(曼)과 8대 후손 성항(性恒)이 상의하여 단출한 상석을 놓고 짤막한 묘비를 세웠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 전야인 8월 26일 밤에 굉음을 내며 부러졌다. 이 비는 1988년 음력 10월 10일 복원하여 사당 북쪽에 모셨으며 지금 산소에 서 있는 묘비는 1915년 3월에 새로 세운 것이다.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부사 성항(性恒)의 묘갈문 가운데 “양녕대군이 덕으로 양위하사 우리 세종대왕 같으신 성군의 치적을 남기게 하시니 그 지덕(至德)은 주(周)나라 태백(太伯)과 우중(虞中)으로 더불어 같다.”고 하였다



▲ 양녕대군 묘비. 1910년 경술국치 전날인 8월 28일 밤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난 것을 근래에 다시 붙여 세웠다.

꾸밈없는 천성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세상을 살다간 양녕대군은 지금 서울 동작구 상도4동 221번지에 잠들어 있다. 강정공(剛靖公) 양녕대군과 한때 세자빈이었던 수성부부인 김씨 부부의 합장묘 앞에 있는 묘비는 1915년에 새로 세운 것이고, 본래의 비석은 1910년 8월 28일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전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떨어져 두 동강으로 깨져버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서 전해오는 양녕대군의 필적은 앞서 말한 숭례문 편액과 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賦)’ 8곡 병풍 목각판이 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은 양녕대군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양녕은 젊어서부터 글을 잘했으나 세종이 덕이 있음을 알고 겉으로 글을 알지 못하는 척하면서 미친 듯 스스로 방탕한 행동을 했으므로 위에서도 그가 글 잘하는 줄을 몰랐다. 늘그막에 양녕이 어떤 중에게 써준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산허리에 둘린 안개로 아침밥을 지어먹고
밤에는 댕댕이덩굴에 걸린 달빛으로
등불을 삼네외로이 바위에 누워 잠자니
마치 한층 탑과 같구나.

아무리 글 잘하는 문장가로도 이보다 더 잘 짓지는 못하리라. 양녕이 비록 덕을 잃어 폐세자는 되었지만 미친 척하고 자취를 감추어 호방하게 지낸 일은 실로 태백(泰伯 : 주문왕의 삼촌)의 행동과 같았다.’

山霞朝作飯
산의 노을로 아침 밥을 짓고
蘿月夜爲燈
숲 사이 돋는 달로 밤에 등불을 삼네
獨宿孤庵下
외로운 암자 찾아 홀로 자니
猶存塔一層
중들은 어디가고 탑만 서 있네